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쇠렌 키르케고르 (문단 편집) == 영향 == 그나마 늘그막에 인정을 받았던 [[아르투어 쇼펜하우어]]와 달리 키르케고르의 사상은 그의 생애 동안 전혀 인정받지 못했다. 이는 그의 사상이 비타협적이고 자학적이며 급진적이기도 했지만, 그가 덴마크어로 대부분의 저술을 진행하여 유럽 사회에 그의 사상이 알려지기까지 어느 정도 시간이 걸렸다는 것도 한몫하였다. 그에 대한 논의는 1890년도에야 겨우 역사에 등장하며, 그의 전집이 출판된 것은 1909년이었다. 그러나 그 이후로 그는 본격적으로 재평가되어 '세계를 그 이전과 이후로 가르는' 대접을 받게 된다. 그의 기독교 사상은 20세기 초반의 변증법적 신학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20세기 이후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실존주의]]나 기초 존재론에 대한 모든 사상은 그를 시초로 하고 있다. 그러나 '실존주의의 아버지'라는 칭호는 그를 온전히 담지 못한다. 그의 실존주의는 [[칼 바르트]]의 신학적 실존주의와도 다르고, [[마르틴 하이데거]]와 [[장폴 사르트르]]의 철학적 실존주의와도 다르기 때문이다. 개신교와 가톨릭 그리고 정교회에 이르기까지 키르케고르는 마르틴 루터를 잇는 위대한 현대 신학의 아버지라 불리운다. 그 이유에는 전통, 권위, 성사들에 대하여 정면으로 거부하고 오직 '신 앞에 선 단독자'에 주목하는 그의 개인주의 때문이다. 그런데 그의 개인주의는 근대 철학과 또 다른 길을 향해 간다. 근대 철학이 모두 개인의 내면, 그리고 궁극적으로 이성을 향해 간다면 키르케고르는 초월(transcendentia)을 향한다. 헤겔의 전체주의적 철학만 비난한 것이 아니라 추상적 사변과 교리 해석을 통해 신의 기적과 신비를 설명하려는 모든 신학을 공격한 셈이다. 때문에 그가 말하는 인간은 근대성의 인간과 아무 상관이 없다. 이 점은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와 정면으로 부딪힌다. 슐라이어마허가 이성과 믿음의 조화를 추구하였다면 키르케고르는 투쟁을 추구하였다. 키르케고르의 변증법은 진정한 '이것이냐 저것이냐', 곧 철학이냐 신앙이냐에 관한 것이다. 이렇게 이성에 조금도 양보 없이 신앙을 옹호하면서, 동시에 당대의 권위주의적이고 관료적인 국가 교회에 대한 조롱에 가까운 비난을 했기에 그의 사상을 신비주의라고 부르기도 한다. 연구자들은 당시 교양을 갖춘 지식인들을 향해 기독교를 변호하기 위해 키르케고르가 교묘한 전략을 사용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실존주의]]하면 떠오르는 프랑스의 흐름은 키르케고르와 [[현상학]]의 만남이라고 할 수 있다. 현상학 쪽 라인은 헤겔이나 그 이전 낭만주의까지 가야 정확하겠지만, 의식의 지향성 등의 요소가 실존에 대한 고민과 합쳐져 자아와 만나 생겨난 흐름이라 할 수 있다. 프랑스 고등 사범 학교 교수인 프레드릭 보름스는 키르케고르의 철학을 '만남에서 실존으로 이행하는 것'이라 요약하고, 프랑스의 실존 관련 흐름은(실존의 문제라고 표현된다) 이것을 '실존은 주어진 것이며 이것이 만남으로 향한다.'로 바꾸었다고 설명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